과거를 더듬으며 자전거를 타는 기분이 썩 괜찮다. 2014년 당시 별 생각없이 서울에서 울산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야겠다 마음먹고 시작했던 자전거 국토 종주길은 얼마 남지 않은 민간 생활의 끝을 향해 달리는 것 같이 내 마음 속이 그렇게 상쾌하지 못했었다. 아마 군 입대를 일주일 앞두고 울산에 도착 했었던 것 같다. 그 때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서 나중에 이 길을 다시 달린다면 지금을 떠올리면 어떨까 생각을 했었는데 이렇게 전역을 하고 한참이 지난 시점에 다시 그 길 위를 달리고 있으니 태오는 그 때 정말 행복했겠구나 싶었다.
아무리 힘들고 지치는 순간이라도 나중에 그 순간을 기억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다. 모든 순간은 언제나 그렇든 지나가기 마련이고, 결과가 너무 치명적이라 트라우마로 남을 수준이 아니면 그렇게 지나가버린 기억들은 하루하루 풍화 침식되어 어엿븐 추억이 되어있다. 훗날 회상했을 때 '그땐 그랬지~'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으려면 아무리 절망적인 순간이라도 어떻게든 그때의 순간에 대한 흔적을 남겨두는 것이 인생 살이의 특별한 별미가 아니겠나 싶다.
0917
우리나라 제일 예쁜 것 같다. 적절히 높고 우거진 산도 멋있고 강도 멋있다. 자전거 길도 우리나라가 최고다. 얼마나 최고냐면 길이 험해서 하루 쌔가 빠져라 달려도 80km가기가 힘들었는데 여기서는 여유롭게 달려도 130km나 갈 수 있다. 내일은 이화령 고개를 넘어야 한다. 예전엔 모르고 넘었었지만 이젠 알고 넘어야하기 때문에 무섭다. 해가 7시면 지니까 하루가 짧아진 것 같다. 탄금대 공원에 그냥 텐트를 쳤다. 내일 아침 누군가 깨워주려나 싶다. 경찰은 아니었으면 좋겠다.
0918
이화령을 넘었다.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손도 팔도 다 아팠지만 그래도 끌지 않고 무사히 올라갔다. 다른 곳에서는 끌더라도 여기서는 끌고 싶지 않았다. 저번에는 여기가 어딘지 몰라서 잘 올라갈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짐도 많고 여기가 어디고 얼마나 올라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힘들었던 것 같다. 충주는 사과가 유명하다. 얼마나 유명하냐면 마을에 가로수가 사과나무다. 표지판 같은게 없어서 오감이 즐거운 여행길이 됐었다. 조금 가지고 온 사과를 이화령 정상에서 먹었는데 그동안 조금 더 익었는지 더 달게 느껴졌다. 문경으로 넘어왔는데 문경도 사과가 유명하다고 한다. 가로수가 사과나무가 아니라 문경 사과는 맛보기 힘들 것 같다.
뭐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이다. 아주 끝내주는 이화령 내리막길에서 바퀴가 터졌다. 튜브가 완전히 찢어져 수리조차 불가능했다. 다치지 않은건 다행이지만 긴 내리막을 걸어서 내려온건 정말 재앙과도 같았다. 그의 표정에 깊은 고뇌가 서려있다.